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3호 전차 (문단 편집) === 초기 === [[노이바우파초이크]]의 실패가 자명해지던 1934년 1월, 37mm급 주력전차와 75mm급 지원전차의 구분이 정립되면서 Zugführerwagen(소대장차량) 약자 Z.W.라는 이름으로 3,7cm 주포를 탑재한 10톤급의 전차개발이 시작되었다. [[라인메탈]], [[MAN]], [[메르세데스-벤츠|다임러-벤츠]], [[크루프]] 이상 4개사에 설계가 주문되어 4개사에서 각기 최초설계안을 제시받은 후, 다임러-벤츠와 MAN 양사는 시험용 차체를 생산하고, 라인메탈과 크루프 양사는 시험용 포탑을 생산하여 차체와 포탑에서 제각기 경합을 벌이도록 하였는데, MAN 사는 이후 개발을 포기하면서 차체는 다임러-벤츠 사가 전담하였고 라인메탈과 크루프 양사의 포탑이 경합하여 크루프 사의 포탑이 채택되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Bundesarchiv_Bild_101III-Zschaeckel-208-25%2C_Schlacht_um_Kursk%2C_Panzer_III.jpg|width=100%]]}}} || || '''3호 전차의 승무원들''' || 무전기는 기본탑재였고, 경 트랙터의 시험운용에서 얻은 교훈[* 본디 전차장, 탄약수, 포수를 모두 포탑에 배치코자 했으나, 경 트랙터의 크기와 포탑내 용적의 제한으로 전차장이 탄약수를 겸했다.]을 바탕으로 2차 대전기 독일 [[전차 승무원]]의 5인 구성(전차장-포수-탄약수-조종수-무전수)을 확립했다.[* 간혹, 이 부분만 보고서 3호 전차가 3인승 포탑과 차체 무전수를 정립하였으며 타국의 전차 운용은 이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3호 전차가 "현대 전차의 아버지"라고 불린다는 주장이 있는데, 3인승 포탑과 차체 무전수가 타국의 전차에 영향을 주었다는 주장 부터가 틀린 주장이다. 우선 3인승 포탑은 3호 전차가 등장하기 전에 영국에서 먼저 주목하고 전간기 [[빅커스 미디엄|빅커스 중형전차]]와 [[인디펜던트 전차]]에 그대로 채택하였고, 독일이 다포탑 전차를 참조하면서 3인승 포탑을 배워간 것이기 때문에 인과관계가 뒤바뀐 주장이며, 무전기에 관한 내용 또한 3호 전차 등장 이전 부터 이미 영국은 1932년에 포탑 후방으로 옮겨 장전수와 전차장이 상황에 따라 사용하도록 했으며 이를 2차 대전기 그대로 사용했기 때문에 3호 전차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 있을리가 없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www.modelsale.com/t3_MIN35166.jpg|width=100%]]}}} || || '''Panzerkampfwagen III Ausf. C''' || 다임러-벤츠의 ZW를 다소 개량한 A형은 1935년 12월 10량이 주문되었으나, 코일스프링 현가장치가 심각한 문제를 일으켰고 독일군은 1937년 5월이 되도록 단 1량의 3호 전차도 수령할 수가 없었다. 결국 다임러-벤츠가 준비했던 설계중 [[리프 스프링 서스펜션|리프스프링 현가장치]]를 사용했던 ZW3 설계를 개량하고 B형으로 15량 주문하여 1937년 12월까지 13량이 완성되었다. 그러나 현가장치를 교체하였는데도 문제를 완전히 해소할 수 없어 이번에는 ZW3의 개량형 설계였던 ZW4를 C형으로 15량 주문하였고 1938년에는 현가장치를 또다시 개량한 D형이 30량 주문되었으나 여전히 불만스러운 상황이었다. A형에서 D형으로 내려오면서 엔진실, 관측창 등이 소소하게 개량되었지만 결국 현가장치 문제를 극복할 수는 없었다. 결국 독일은 3호 전차를 처음부터 다시 설계하여 20톤짜리 신형전차가 나왔다. 장갑 두께는 14.5mm에서 30mm로 강화되었고 [[마이바흐]] 사의 신형 HL 120 엔진을 탑재하면서 차량의 최고시속이 69km[* 독소협력의 일환으로 소련에 판매된 차량의 기록.]에 달하였다. 특히 당시로서는 최첨단 기술이었던 [[세미오토|반자동변속기]]와 토션 바 현가장치[* 3호 전차 이전에는 스웨덴의 Strv L-60 전차에 사용된 적이 있다.]를 사용하여 구동계 문제를 해결하고자했다. 이 전차는 1938년 5월부터 출고를 시작할 예정이었다. 문제는 이 반자동변속기가 아직 초기단계였던 탓인지 최초로 생산된 3호 전차용 변속기들은 전부 결함품에 가까웠다는 점이다. 설계변경, 시험운행, 원인분석, 재설계까지 1년이라는 시간을 잡아먹었으므로 1939년 9월 [[제2차 세계 대전]]이 터지던 순간까지 E형은 제대로 양산될 수 없었다. 1938년 독일군이 수령한 3호 전차 E형은 한 대에 불과했고, 1939년 1월부터 7월까지 도합 30량을 수령하였으며, 8월에 가서야 월 20량 이상을 수령할 수 있었다. 변속기만큼은 아니지만 토션 바 현가장치의 기계적인 하자도 끊이지 않았다. 이런 문제 때문에 생산은 계속 지연되어, 1939년 9월 1일 개전 당시, 주력이라는 3호 전차의 보유대수는 세 자리수도 못 미치는 98량, 그나마도 일선에 배치된 차량수를 따지면 불과 87량에 불과하였다. 반면에 지원전차였으며 3호 전차보다 그 덩치도 무게도 컸던 4호 전차는 각각 211량, 197량으로 3호 전차보다 수적으로 2배 이상 많았다. 개전과 거의 동시에 출고가 시작된 F형과 40년 3월 출고가 시작된 G형은 엔진 등 몇몇 미세한 차이만 제외하면 사실상 E형과 동형이지만 F형의 생산개시가 39년 8월까지 지연되는 와중에 최고속력을 67km에서 40km로 줄이고, [[클러치]]를 추가하는 등의 개선점들이 뒤늦게 양산된 F형과 G형에 자연스럽게 적용된 덕분에 E형보다 훨씬 신뢰성이 높아졌다. 그러나 잦은 변속기 고장은 계속해서 3호 전차를 괴롭혔다. 이 생산지연으로 생긴 전력공백을 메꿔준 것은 [[체코슬로바키아]]산 전차들로, 1939년 3월 체코슬로바키아가 병탄되면서 [[스코다]] 사의 [[LT vz. 35]] 전차 244량이 압류되어 독일 국방군의 손에 35(t)라는 제식명을 받고 도입되었다. 하지만 독일군은 35(t)를 구형으로 판단하였으므로 생산을 중단시켰으나, 3호 전차와 동급 무장과 장갑을 갖추었다고 판단하여 많은 부대에 3호 전차 대역으로 배치되었고, 병탄 직전에 막 개발이 끝난 CKD 사의 [[LT vz. 38]] 전차가 본격적으로 양산된다. 개전 초기, 202량이 접수된 35(t)는 일선부대에 164량, 38(t)는 78량이 생산, 일선부대에 57량이 배치되어 3호의 공백을 다소 메꿨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Flickr_-_davehighbury_-_Bovington_Tank_Museum_058_Panzer_1.jpg|width=100%]]}}} || || '''3호 전차의 상판부. 전방 해치가 없음을 볼 수 있다.''' || 거기다 3호 전차에는 큰 문제점이 두가지 있었는데, 첫째는 앞좌석에 승무원 해치가 없었다.[* 변속기쪽에 보이는 해치 두개는 정비용이었다.] 통신병과 조종수도 반드시 포탑으로만 탑승, 탈출했어야 한다는 이야기인데, 안그래도 비좁은 포탑 내부가 더 좁게 느껴졌고, 이는 소련 전차들보다도 더 열악한 구조였다. 측면에 작은 탈출구가 있기는 했지만, 이마저도 측면에 쉬르첸이 달린 M형부터는 삭제되었다. 둘째는 독일 전차들의 고질병인 변속기 교체인데 심각했던 판터나 티거를 뛰어넘는 수준이었다. 변속기를 교체하기 위해선 포탑을 들어올린 후, 차체의 상단 부분(정면에서 보았을 때 수직장갑과 연결된 부분 전체)의 볼트를 풀어서 들어 올려야 가능했다. 티거나 판터도 타국보다는 불편했지만 차체 윗면의 승강구를 포함한 변속기 커버만 뜯어내면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